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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자극하는 것들/음악과 영화, 그리고 책

고은 인터뷰 - 폐허 위에 화엄의 집 지은 시인 고은

폐허 위에 화엄의 집 지은 시인 고은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 위치한 고은 선생을 댁을 찾은 지난 2월 7일엔 새벽부터 큰 눈이 내렸다. 출발하기 직전 자택에 전화를 걸었더니 부인 이상화(중앙대 영문과 교수) 선생께서 안성에서 산 23년 동안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이라며 여로를 걱정해 주었다. 하지만 강행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고은이기 때문이었고, 고은은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문인이기 때문이었다. 시인 고은은 지난 해 절반 이상을 해외에 불려 다녔고, 올해만도 1월말에 벌써 이탈리아어판 시집 《순간의 꽃》 발간을 계기로 밀라노에서 발간 기념행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러고 돌아와선 곧바로 올해 완간을 목표로 하는《만인보》의 마지막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문학을 매개로 한 대외적 행사에서는 물론 집필 분량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람, 그가 고은이다. 명성이 큰 사람일수록 극과 극의 평판을 오가고 시인 고은 또한 그러한 존재이지만, 지금 세계에서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 고은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극단적 허무주의자에서 유미주의자로, 다시 민족의 현실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리얼리스트로서의 골곡 많은 그의 생 자체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도 같은 대서사시다. 그의 서사시적 인생은 이미 전설이 된 만큼 잘 알려져 있지만, 안다고 해서 압도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면 알수록 단절과 변모를 거듭한 인생을 어떻게 한 개별자의 삶으로 통합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눈발의 예측 불가능한 날씨처럼, 선생의 집으로 행하는 기자의 마음 또한 그랬다.


죽음에의 유혹, 그리고 시

 고은은 1933년 8월 1일 전북 군산에서 아버지 고근식, 어머니 최점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정다감한 아버지와 무뚝뚝한 어머니라는 상반된 성품의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공부는 물론 일본어 작문과 미술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던 고은은 가족과 학교에서 두루 큰 사랑을 받으며 컸다. 식민지라는 시대적 우울과 타고난 어둡고도 그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결합되어 그는 반 고흐나 나병 시인 한하운과 같은 비극적 삶과 예술에 경도되었지만, 그의 삶을 죽음과 파격의 역동적 미학으로 이끌었던 것은 고은의 눈앞에 무참하리만치 생생하게 폐허를 보여준 한국전쟁이라는 ‘현실’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의 성공을 위해 관심 분산의 차원에서 군산 항구를 폭격했고, 그는 가난했지만 활기에 넘쳤던 자신의 고향이 한순간에 폐허로 바뀌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또한 좌우의 대립이 서로를 죽음으로 내몰던 야만의 시대는 어린 소년을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모든 가치를 부정하게끔 만들었다. 그런 정신적인 충격 속에서 다음해인 1951년 그는 두 차례의 자살 시도를 했고, 군산북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동국사에서 승려 혜초를 만남으로써 속세의 삶을 접고 승려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동양철학은 물론 서양철학까지 두루 섭렵하게 만들었다가 갑작스레 환속해 충격을 안겨준 혜초를 거쳐, 다시 혜초의 스승인 효봉을 스승으로 섬기며 수행과 행각승으로 전국을 떠돈 지 5년만인 24세에, 그는 효봉 스님을 따라 상경해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주필 자리에 앉는다. 이 《불교신문》을 편집하며 자투리 공간에 자신의 시를 끼워 넣던 고은은 다음해인 1958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고, 오랜 부패의 역사가 죽음으로 삶을 회생시킨 4·19 혁명의 짧은 불길 속이던 1960년에 첫 시집 《피안감성》을 펴낸다. 그리고 그 2년 후인 1962년, 지속적으로 증폭되어 왔던 불교 종단에 대한 실망으로 마침내 환속을 선언한다.

 다음해인 1963년, 그의 나이 서른에 그는 제주행 배를 탄다. 목적은 선상 자살. 세 번째 시도마저 미수로 그친 그는 천분으로 태어난 시인으로서의 의무에 겸허해지기로 한다. “죽지 못해 살아난 인생, 내 모국어를 다시 배워야겠다는 결심”으로 제주도 촌구석 제지소에서 구한 허름한 사전을 달달 외기 시작한다. 창녀촌에서 하숙하며 취한 밤이면 무덤으로 찾아들고 그러면서도 미친 듯 사전을 외고 시를 쓰던 나날. 잠든 고은의 모습을 그 누가 건드릴 수 있었겠는가. 인간이 가진 달랑 두 가지, 육체와 정신으로 그는 죽음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지향의 목적은 ‘소통’이었다. 그는 시로써 세상에 말 걸고 싶었고, 내면으로 침잠할 때면 자신 속에 양립하고 있는 삶과 죽음에게 말 걸고 싶었다. 무덤 속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거처를 침범한 취한 고은의 얼굴을 바라보는 귀신조차 그런 그를 어쩌지 못했으리라. 그 소통의 욕망이 죽음의 형식으로 나아가더라도 신은 가끔 멈칫한다. 그 욕망과 형식의 조화가 최대의 아름다움을 빚어낸다면. 신도 멈칫거리게 한 고은의 아름다운 시편은 그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평론가 김현을 제 발로 제주도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가 흠모하여  배운 보들레르를 그 자체로 살고 있는 승려 출신의 시인이 자신의 모국 제주도에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현은 술 취한 고은이 뱉어놓은 주사조차 메모해 다음날 그에게 들려줬다. ‘당신이 어제 이렇게 위대한 말을 했다’라면서.

그런 제주도 생활 4년을 끝내고 고은은 서울로 올라간다.


불타(佛陀)의 절망, 인간의 절망

“여전히 늘 삶의 의미보다 죽음을 찾고 있을 때였지. 무교동 술집에서 술만 퍼먹고. 그때 소주는 35도 독주였고 밥 안 먹고 낙지 같은 매운 안주만 먹었어.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주인이 내쫓는데도 술집 의자 위에서 잤어. 그러던 어느 날 자다가 굴러 떨어져 시멘트 바닥에서 눈을 뜨니, 옆에 신문지 쪼가리가 굴러다니더라고.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실려 있었고, 그에 대한 사설도 실려 있었죠. 나도 끊임없이 죽음을 추구한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은 왜 죽음을 택했나, 머릿속에서 그의 죽음이 악몽처럼 떨어지지가 않더라고.”

 1970년,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때까지 총리 이름도 모르고 시장에서 콩나물 값이 얼마인지도 몰랐던 그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인해 마치 도미노 게임의 카드가 와르르 한쪽으로 쓰러지듯이 급격히 사회현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그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개인적·조직적 활동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삼선개헌 반대운동의 문인 대표로 참여했고, 간첩 사건 등 온갖 공안 조작사건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저항에 선두를 지켰으며, 1974년엔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창립하고 가택구금과 체포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 박정희 유신시절은 김재규의 총탄으로 스러져가는 듯 보였다.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 박정희의 유신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처럼 느껴지던 혼란기가 있었죠. 그때 나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전국의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 상황과 늘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 직후 들어선 신군부 정권이 ‘내란 음모’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나를 남한산성 밑의 육군교도소 특별 감방에 수감했어요. 육군교도소의 특별 감방은 창도 없었고, 미로 구조라서 누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어요. 40촉짜리 전등불이 꺼지면, 사진을 현상할 수 있을 만한 암실이 되었죠. 그 당시 김대중, 문익환 등 나를 포함해 그 특별 감방에 갇힌 다섯 사람은 살아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들어가는 통로에서부터 고정된 기관총을 볼 수 있었으니까. 이따금 전기가 꺼졌어요. 소장이 나와서 요즘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자주 꺼진다고 했지만, 어둠 속에 처박아두는 일종의 고문을 한 것이지. 그런 식으로 그들은 우리의 심신을 완전히 죽여 놨어요.”

 그 속에서 그는 시를 구상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절망적인 수인의 몸으로 오로지 '내가 앞으로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이런 것을 써야겠다’며 시를 구상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이유였다. 나라를 잃었던 시절 나라를 찾기 위한 무장투쟁·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서사시(《백두산》), 자신이 직접 만난 사람뿐 아니라 만나지 않은 사람과 역사 속의 사람, 역사 속에 있을 법한 이름 없는 사람 등을 망라해서 거대한 우리 겨레의 지도를 서사화해야겠다(《만인보》)는 결심을 바로 그때 한 것이다. 1년 동안의 군사재판을 거쳐 고은은 일반 형무소인 대구교도소로 옮겨졌고, 1982년 8·15 사면으로 3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석방된다.

 다음해인 1983년 5월, 그는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막 영국 유학에서 돌아왔던 이상화와 운명 같은 결혼식을 올린다. 수유동에 있던 신학자 안병무의 집에서 지인 100명만 초청해 식을 올렸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지금 살고 있는 안성으로 삶터를 옮겼다.

 “그때까지 나는 안성에 어떤 연고도 없었어요. 그런데 나랑 민주화투쟁을 한 고려대 법대 이문영 교수가 나와 함께 감옥에서 나온 뒤로 드라이브 겸 안성을 찾았나봐. 그러고선 나에게 전화를 하더라고.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고은 선생 살라고 내려주신 집을 보고 왓습니다’라고. 그 수사가 좋아서 조금 있으면 내 아내 될 사람과 이문영 교수를 따라서 안성엘 왔고 그 자리에서 살기로 결정해 버렸어요.”

 옥중에서는 미친 듯 시를 쓰고 싶었건만, 막상 나와 보니 그 욕망들이 마치 홍수에 가재도구들이 죄다 떠내려가듯 일시에 사라져버려 다시 폐허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거쳐 안성에 정착한 지 2년 만에 비로소 그는 구상해놓았던 장편 대서사시 《백두산》과 《만인보》를 신들린 듯 세상 밖으로 꺼내놓을 수 있었다.

 고은의 행보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남북작가회의의 추진이었고 마침내 해방 60년을 맞은 지난 해 6월 15일, 최초의 남북작가회의가 백두산과 묘향산에서 5박6일 동안 진행됐다.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특별 강연에서 처음으로 남북작가회담을 제안했었어요. 당시엔 그런 제안만으로 감옥에 가서 장기수가 될 수 있는 시절이라 안기부한테 협박 많이 당했어요. 그래도 나는 그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북쪽과 연락해서 작가회담을 성사시켜 달라고 극비리에 끊임없이 부탁을 했었죠. 드디어 1989년 북쪽에서 회담에 응하겠다는 통지가 왔어요. 그래서 나와 신경림·백낙청 등 남쪽 대표 5인이 판문점으로 향했는데, 미군의 승인 없이 판문점에 들어갈 수가 있나. 다들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만 혼자 상징적으로 잡혀서 국가보안법으로 4번째 옥살이를 했어요. 그러나 당시 국제 팬클럽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문인들이 열렬하게 구명 운동을 해주어서 석방될 수 있었죠.”

그런 고초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을 통해 꾸준히 남과 북의 작가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모임을 시도한 지 15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룬 것이다.  

“그 감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지. 백두산에 오르기 전날 밤 불안해서 잠이 안 왔어요. 내가 1997년 처음으로 방북해 백두산에 오른 전날에도 흥분감에 잠을 못 이뤘던 것처럼. 힘들게 이루어진 일인 만큼 자연의 축복도 받고 싶었어. 그러나 백두산의 기후는 불안정해서 어떻게 될지 몰랐지. 다음날 새벽에 북쪽 대표자랑 백두산을 올랐더니 해가 벌겋게 떠오르는 거야. 그리고 한쪽에선 달도 아직 지지 않고 있었죠. 일월이 같이 있는 광경, 그 얼마나 축복이야. 그런 장관 속에서 남과 북의 작가들이 서로 껴안으며 두 시간 동안의 축제를 보내고 내려왔어요.” 

 그는 또 지난해 1월 결성된 겨레말 큰 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의 상임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7~8년 뒤 남북이 최초로 하나의 사전을 가지게 되는 사업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죽기 전에 겨레의 말이 하나의 사전 속에 함께 묶여지는 것을 이룬다면, 은혜를 많이 받은 이 땅에서 조금은 빚을 갚고 여한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음의 폐허 위에 화엄의 집을 짓다

그의 문학적 여정에 있어 또 하나의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1999년 미국 하버드대 옌칭스쿨과 버클리대에서 객원교수로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는 한국의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으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아내와 내가 결혼할 때 백낙청 교수가 덕담처럼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죠. 이 결혼은 두 사람만의 결혼이 아니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 만나는 것이라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안식년을 맞은 아내는 하버드대 영문학부 교환교수로, 나는 특별연구교수로 초청돼 미국에 간 것이었고, 거기서 내 문학의 공간이 넓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는 아직도 자기 문학의 고향은 폐허라고 여긴다. 한국전쟁으로 고향이 폐허가 되고 인간의 마음속에도 폐허가 생겨났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 폐허에 더욱 자신의 마음을 부려놨었고, 그것이 젊은 시절 그의 자살 시도를 부추긴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폐허를 좋아하고 거기 익숙하다. 가령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개성 만월대 같은 폐허를 보면 말할 수 없이 황홀해져버리고, 근원으로서의 향수가 살아나는 듯하다. 그런 허무주의에서 나중에는 오스카 와일드나 보들레르 류의 유미주의로 넘어갔고, 전태일과의 만남 이후에 다시 민족문학으로 세계로 들어섰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살다 보니 민족문학에 다른 눈이 붙어야 하고 다른 육체의 살이 붙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회라고 하는 것은 무한히 큰 공간이긴 하지만 또한 인간에게 한계를 주기도 하는 공간이죠. 나는 그런 갇힌 틀 속에서 기계처럼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회와 다른 꿈이 만나는 화엄의 세계, 커다란 포용의 문학을 지향하게 됐어요. 그러던 중 미국에 가서 보다 드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고, 우리의 남과 북을 노래하되 그 대상을 세계로 넓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됐어요. 나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서구문학에만 있고 아시아문학 혹은 한국문학에는 없다는 헛소리들은 인정하지 않아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세계의 보편타당성을 갖는 문학 언어를 꽃피워낼 수 있어요.”

특수와 보편도 서로 몸을 바꾼다. 어떤 특수성은 오랫동안 발전해 보편이 되고, 서구 보편성이라는 것도 서구 중심의 자기 특수성이다. 바로 그런 점을 그는 지난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개막 연설에서 지적했고, 서구 문학인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페허 위에서 지은 고은 문학의 집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이제 통합의 목소리로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파격을 넘어 포용의 세계로

 도저한 허무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변모, 숱한 기행과 뚜렷한 정치적 실천까지, 그의 삶은 도무지 한 사람의 생 같지 않다. 본인 스스로는 그 모두 자신의 삶이였다며 내부에서 통합해낼 수 있을까.

 “그렇지 통합됐지. 통합되어서 지금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본인이 생각해봐도 자기가 복수(複數) 같다며 맑은 웃음을 짓는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단절의 과정으로 점철된 삶으로 해석될 수 있을 텐데. 

 “단절이 있었죠. 어떤 의미에선 단절이 아주 심한 편이었죠. 그러나 그게 그냥 단절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것으로 연결되는 끈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어요. 당시에는 단절이었으나 무한히 다른 것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고 연결되어야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 존재인 것 같아요. 동작, 행위로서의 존재인 것이지.”

 요즘 그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무엇일까.

 “그건 모르겠네. 생각이라는 게 손님이야. 내 소유물로서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가 찾아와서 들렀다가 가는 거지. 나 자신은 궁극적으로는 없어. 자아는 무아야.”

 미국에서 펴낸 그의 《만인보》는 최근 재판에 들어갔고, 지난 겨울 출판한 영문판 《어린 나그네》(소설 《화엄경》) 역시 지금까지 2천200부가 팔렸다. 선시집 《뭐냐》의 영문판도 3쇄에 들어갔고, 같은 시집이 독일에서도 매진되었다. 스웨덴어판 《만인보》 초판이 매진되었으며, 지난 해 8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2005 비에른손 페스티벌’에서는 비에른손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런 국제적 명성으로 그는 2002년부터 매년 10월이 가까워오면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뉴스를 장식하곤 한다.

 “나는 모르는 일이예요. 나 역시 외신을 통해 알려지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그게 나를 참 구속해요. 외국엘 가도 노벨문학상 후보자라는 것이 마치 무슨 내 명함처럼 되어버려서 참 거북해요. 단순하게 ‘시인 아무개’, 그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이제야 알겠어요.”

 올 한 해도 고은을 필요로 하는 국내외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사양하거나 미루면서 올해는 글쓰기에 매진하려고 한다. 써야 할 것이 아직도 많지만 미리 말하고 싶지는 않단다. 산문시도 있고 장시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나가겠다, 나가겠다’ 하고 있는 몸속의 씨앗이 여럿 있다. 물살을 거스르는 고기처럼, 그 씨앗들은 힘이 세다. 

 “시를 쓰다가 죽고, 무덤 속에서도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더 이상 쓸 것이 없을 땐 죽어야겠지?”

 시인 고은의 마지막 말이다.


출처 : 월간 문학사상 2006.3